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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문 열려면 전화부터…’ 여기선 느려도 괜찮아
등록일
2026.07.22 오전 12:00:00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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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시 남쪽 도심을 관통하는 제민천은 구불구불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흘러왔다. 제민천 인근에는 한때 충청 지역을 관할하던 충청감영이 있었다. 이 지역은 배움의 열기로 가득한 학도들의 거점이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아침저녁으로 하숙집에서 밥 짓는 냄새가 피어오르던 곳이었다. 관공서와 대학들이 옮겨간 뒤로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제민천과 그 주변의 마을 사이로 난 길은 오랜 시간의 지문처럼 남아있다.

끝내 사라지는 듯했던 제민천길은 이제 주말마다 ‘느린 여행’을 찾아온 여행객들로 북적인다. 수십 년 전 지어진 주택 사이
를 거닐며 책방을 찾고, 원두 향이 은은
히 번지는 카페에서 두런두런 대화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어느덧 일상이 됐다. 과거 “강 너머 대학생들도 졸업할 때까지 이곳을 방문한 적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적막했던 동네가 어느새 2030세대가 찾는 여행지로 거듭났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제민천 마을 역시 빈집과 고령화로 활력을 잃어가는 원도심과 다르지 않았다. 변화는 타지 사람들이 하나둘 정착하면서 나타났다. 번화한 도시에 지친 이들에게 근현대 문화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한 제민천길은 매력으로 다가왔다.
‘로컬 크리에이터’로 불리는 권오상(50) 퍼즐랩
대표는 우연히 제민천을 방문했다가 15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이곳에 터를 잡았다. 당시 제민천 마을은 20·30대는커녕 40대 주민도 마주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권 대표는 2018년 공주 봉황동의 한옥을 게스트하우스로 꾸민 ‘봉황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2019년엔 마을 설계회사 격인 퍼즐랩을 설립하고 봉황재를 거점으로 마을 골목길 전체를 하나의 즐길거리로 만드는 데 착수했다. 방문객이 지역 예술가와 주민들을 연계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제민천 마을의 역사와 일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구상이었다.
작은 퍼즐 조각이 모여 그림이 완성되듯 제민천에 사람들이 하나둘 정착하며 활기를 띠었다. 서울에서 도서 큐레이션 스타트업을 하던 서동민(45) 대표는 2018년 쉬려고 이곳을 찾았다가
정착해 이듬해 독립서점 ‘가가책방’을 열었다. 사랑방을 떠올리며 쓸모를 다한 가구 등을 목재 삼아 직접 꾸민 책방이었다. 임대료를 제외한 공간 조성 비용은 60여만원에 불과했다.
가가책방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불편한 여행지’ 중 한 곳으로 꼽히기도 했다. 이용자는 간판도 없는 이 책방을 찾아내 직접 자물쇠를 따고 들어가야 한다. 자물쇠 비밀번호는 책방 문에 적힌 번호로 전화해야 알 수 있다. 조명과 에어컨도 직접 켜야 한다. 입장료는 만족도에 따라 계좌로 입금하게 돼 있다.
대구 달서구에서 가가책방을 찾아왔다는 이수민(30)씨는 “책을 좋아해서 독립서점을 찾아다니다 1박 2일 일정으로 이곳을 오게 됐다. 충남은 첫 방문인데 책방뿐 아니라 마을 자체가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서 대표는 21일 “잠시 쉬며 책을 읽고 주변의 갈 만한 곳들을 추천받는 공간”며 “책방과 함께 갤러리, 카페, 소품가게를 둘러보고 숙소에서 하룻밤 묵는 코스가 인기”라고 말했다. 그는 2020년 6월 2호점 격인 ‘가가상점’을 열고 책과 굿즈 등도 판매한다. 제민천길에는 가가책방 외에도 ‘책방, 잇다’ ‘느리게 책방’ ‘오래된 질문’ 등 8곳의 독립책방이 있다. 갤러리와 로스터리 카페에서 휴식을 취하고, 인근 공주 산성시장에서 다양한 먹거리도 맛볼 수 있다.
제민천길이 있는 공주시는 행정안전부가 지정한 인구소멸 지역 89개 시·군 가운데 한 곳이다. 시는 지난해 2분기 생활인구 70만2738명을 기록해 전국 인구감소지역 89곳 가운데 2위를 차지했다. 생활인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체류 인구 역시 월평균 59만8778명으로 전국 3위를 기록했다.
소멸 위기를 맞은 도시에서 제민천길은 문화 중심지로 자리 잡은 모습이다. ‘(백제시대 성곽인) 공산성만 보고 떠나는 반나절짜리 관광지’란 꼬리표를 떼어낸 지 오래다. 서 대표는 “하숙 문화가 남아 있어 타지 사람에게 길을 안내하고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습관이 주민들 몸에 배어 있다. 타지인들이 이곳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환대 속에 하나둘 정착하면서 자연스레 빚어진 결과”라고 말했다.
“옛 호서극장·120년 된 가옥… 문화유산이 지역 주요 콘텐츠로”
권오상 퍼즐랩 대표
“제민천만의 관광자산 유지 중요”

공주 제민천 원도심의 도시 재생은 민간 주도로 이뤄졌다. 사람들이 모여 독립서점과 게스트하우스, 갤러리, 카페 등 다양한 공간을 만들면서 제민천길 상권이 형성됐다.
권오상(사진) 퍼즐랩 대표는 21일 "제민천의 도시 재생은 지자체나 중앙부처 등 공공 부문을 중심으로 한 게 아니라 개인들의 경험과 의지를 토대로 추진됐다"며 "정해진 기준 없이 각자 안목에 따라 지역 문화유산을 유지하고 시대에 맞춰 활용하다 보니 빚어진 결과"라고 말했다.
제민천길에는 역사를 품은 건물들이 많다. 1967년 문을 연 호서극장은 과거 공주 시민들이 자주 찾았던 극장이다. 현재는 미디어아트 전시와 상설·기획 전시, 공연 등을 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 중이다.
갤러리 마주안은 120여년 된 가옥을 개조해 만든 갤러리다. 나태주 풀꽃문학관은 1910년대 일제강점기 일본식 가옥을 리모델링해 만들어졌다. 옛 공주읍사무소는 1923년 건립돼 1989년까지 공주읍사무소, 공주시청으로 사용되다 2021년 역사 탐방과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권 대표는 "문화유산을 지역 특성과 트렌드에 맞춰 각자 생업에 적절히 활용하는 곳이 제민천 일대"라며 "원도심 재생 명목으로 예산을 들여 오래된 건축물을 복원한 뒤 정작 비워두는 다른 지역과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제민천 일대 문화유산을 활용한 로컬 콘텐츠는 현재 퍼즐랩이 운영 중인 마을 투어의 주요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제민천은 올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한 '제2기 로컬100(지역문화매력 100선)'에 선정됐다. 다만 제민천길의 변화를 바라보는 권 대표의 심정은 복잡했다. 권 대표는 "외지인이 개발이나 자본의 논리만 갖고 들어와 제민천의 고유 가치를 훼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며 "다행히 제민천 일대가 문화재 보호구역이라 개발 이익이나 건물의 시세 차익을 실현하는 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또 "소비 시장으로 머물지 않도록 제민천만의 관광 자산과 문화 수준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